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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_김수미
앞면이 보이는 동전 한 개가 놓여 있다. 우리에게 동전은 앞면의 그림으로 보이지만 뒷면의 숫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뒷면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일상에서 우리는 이면이 항상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보이는 면 만을 해석한다. «Negative Platform»에서 세 작가는 주지되어오지 않은 것에 대해 주목하며 인식을 확장시킨다. 감각의 교환, 세계의 확장 그리고 음과 양의 전환을 통해 양면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다양한 매체로 표현하고. 나아가 서로를 관통하는 지점이 무엇인지 찾고자 했다.
이산오는 문자를 통해 이미지를, 이미지를 통해 문자를 연상시키며 감각을 교환한다.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언어들을 나열한 후 다듬는 과정을 거친다. 무의식을 의식으로 전환시키는 과정을 통해 비가시적 감각을 가시적 형상으로 실제 시킨다. 시를 도자 판에 거꾸로 옮겨야 하는 작업의 과정에서 단어들이 갖는 의미들은 뒤집어진다. 각 매체를 서로를 위한 수단으로 만들며 매체 간 그어진 선을 허문다. 이승연은 망자들이 존재하는 세계를 상상하며 삶과 죽음을 연결한다. 흑백을 반전시킨 사진을 참고하여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서 전경과 배경이 비슷해 보이는 지점을 발견한다. 사라지는 것들을 직시할 때 마주하는 마음을 슬픔이 아닌 비어 있음으로 바라보고 뭉쳐진 덩어리로 빈 곳을 채운다. 평면의 종이에 흑연을 문지르는 행위를 입체의 점토를 덧붙이는 행위로 확장시킨다. 김슬기는 아크릴의 조각을 이용하여 음각과 양각, 빛과 그림자의 관계를 탐구한다. 고정적으로 인식되었던 영역을 가변적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빛을 이용하는데, 빛이 아크릴을 지나며 만드는 그림자에 의해 조각의 실루엣은 부각된다. 이동하는 그림자의 궤적에 의해 공간은 계속해서 변화하게 된다. 평평한 면을 파내는 부조 작업에서 음각을 통해 양각을 드러낸다.
보이지 않는 너머의 것으로 시선이 전환되는 순간 무한한 가능성은 열리게 된다. 그동안 주지되어오지 않았던 영역에 대한 담화를 나누며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세 작가는 서로의 키워드가 작업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음을 발견한다. 허물어진 경계는 또 다른 영역을 품으며 다양한 스펙트럼을 제시할 수 있다. 무한한 세계에서 비로소 우리는 하나로 공통될 수 있음을 전시를 통해 말하고자 한다. (글 : 이산오)
눈을 감아야 선명해지는 세계
“(…) 보이는 세계가 엄밀한 의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요, 보이는 세계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안감을 모종의 부재로 현존케 한다는 뜻이다.”[1]
보이지 않고 만져지지 않는 존재가 부피와 무게를 지닌 물질을 한 겹 덮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실존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을 사실이라 생각하며, 사물의 외면만을 바라보고 실재를 인식하는 것에 익숙하다. 그러나 눈을 감아야 비로소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Negative Platform》의 세 명의 안내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 위에서 쉽사리 형태를 드러내지 않는 존재에 대한 단서를 쫓는다. 그것은 의식과 무의식의 교차(이산오), 삶에서 발견되는 죽음의 흔적(이승연), 안과 밖의 관계(김슬기)를 살펴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이들은 서로 상충하는 개념을 한자리에 공존시키며 비가시적인 형체의 자취를 찾아간다. 이들이 각자 제시하는 ‘네거티브(negative)’를 따라가기 위해서, 모든 것이 불명확한 경계 선상에 놓인 꿈이 가진 속성을 떠올려본다.
현실-상상
꿈은 현실을 상징적으로 내보이기도, 짓궂은 허구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잠이 들면 신체와 정신은 서로 단단히 묶어놓았던 끈을 느슨하게 풀고 모호함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때 분리된 의식은 무의식에서 추출한 꿈의 재료들을 잘 버무려 상상력으로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 이산오는 시공간을 뒤틀고 현실과 비현실적 요소를 뒤섞어 꿈과 같은 이미지를 만든다. 그는 문장에서 시작해 그것을 이미지로 변환시키고, 이는 다시 도자 위에 올려진다. 꿈속에 또 다른 꿈이 겹치듯이 작업 안에서 매체를 중첩하고 층을 쌓아가면서 현실과 상상의 경계는 자연스럽게 와해된다.
삶-죽음
꿈을 관장하는 그리스 신 모르페우스(Morpheus)는 잠의 신 히프노스(Hypnos)의 아들이며, 히프노스의 쌍둥이 형제는 죽음의 신 타나토스(Thanatos)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죽음을 영원한 잠으로 생각했고 ‘영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지금에 이르기까지, 잠과 죽음의 연관성은 여전히 유효하며 꿈은 이 둘 사이에 있다. 꿈의 신 모르페우스의 이름은 ‘형상’, ‘형태’를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파생되어 ‘형상을 빚는 자’를 뜻한다. 이승연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더는 보이지 않는 존재의 사라진 흔적을 찾는다. 그는 흑연과 점토를 사용해 손끝으로 만져가는 감각으로 명료하게 드러나지 않는 형태를 더듬어가고, 마치 꿈의 신이 꿈을 만들 듯 이를 흐릿한 덩어리의 형상으로 빚어낸다.
안-밖
잠을 자는 동안 신체는 정지해있지만, 꿈속에서의 몸은 계속해서 감각하고 운동한다. 외형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 신체, 그러나 멈춰있는 인체 내부에는 분명한 자극을 느끼며 움직이는 몸이 존재한다. 눈꺼풀을 내려 시각을 차단해야 보이는 꿈의 세계는 우리의 몸을 하나의 경계선으로 삼아 외부와 내부를 잇는다. 어쩌면 꿈을 꾸는 것은 보이는 세계가 지닌 내면을 슬쩍 엿보는 시간일 수 있다. 이로써 꿈은 현실의 안감이자 그 자체로 현실이 된다. 김슬기는 조각에서 네거티브(음각)와 포지티브(양각)의 대립 항을 통해 안과 밖의 기존 형식을 전환한다. 그에게 비어있는 구멍은 가득 채울 수 있는 공간이자 잡을 수 없는 빛을 그림자의 변환된 형태로 붙잡는 역할을 하고, 오목하고 볼록한 표면의 대비는 빛이 만들어내는 명암을 드러낸다.
불투명한 양감에 둘러싸인 세상에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투명한 존재를 알아차리기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세 명의 작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세상은 보이지 않는 것들로 더 단단해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현실과 상상, 삶과 죽음, 안과 밖이 혼재된 이 경계 위에 서서, 눈을 감아야만 선명하게 보이는 존재를 찾는 것이며 계속해서 찾아야 함을 믿는다. (글 : 김재연)
[1] 모리스 메를로 퐁티, 『눈과 마음』, 김정아 옮김, 마음산책, 2008, p.141.